중동화약고에 피어난 경이로운 나라, 레바논을 가다(전편)

종파간 의회 의석수 고루 배정…기독교·이슬람 64석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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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토 면적이 우리나라 경기도만한 넓이에 높이 3000m가 넘는 산이 3개나 솟아 있고, 미국의 그랜드 캐니언을 방불케 하는 계곡이 수없이 많은 나라, 수명이 2천~3천년이나 된다고 성서에 기록돼 있는 백향목이 자라는 나라. 이는 레바논을 두고 하는 말이다.

산 정상에서는 스키를 즐기고, 해변가 모래사장에서 해수욕을 즐기는 피서객이 있는 나라, 인구는 400만여 명이지만, 민족과 종교가 다양하기 이를 데 없는 난해하고 흥미진진한 나라가 바로 레바논이다.

30년 간의 내란으로 인구의 3분의1이 가족을 잃거나 고향을 등지고 이민을 가버린 나라, 종파가 다르다고 산 넘어 저쪽에서는 전쟁을 치르면서 이쪽 동네에서는 서로 만찬을 하며 대화를 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지금도 모든 종교가 서로 어우러져 긴장하고 반목하고 때로는 타협하고 연합하면서 살고 있다.

경이로운 레바논

종파간 의회 의석수가 고정돼 있고, 뽑아야 할 대통령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대통령이 몇 달째 공석 중에 있다. 한때는 로마가톨릭의 동방 경영의 중심지였고, 유대교, 기독교 선교역사의 전진기지이기도 했다.

레바논 계곡에 자리잡고 있는 한 수도원의 모습.

1943년 독립 당시, 전체 인구 중 기독교인 비율이 과반 이상이었으나 현재는 오히려 이슬람 인구가 과반을 넘어가며 기독교국가도 이슬람국가도 아닌 다종교, 종교연합국가 형태를 띠고 있다. 전쟁과 파괴의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레바논의 경이는 종교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전통이 여전히 살아 있고, 중동에서 유일하게 종파간 평화공존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나라다. 헌법이 보장하는 종파간 국회의 구성을 보면 이것을 실감할 수 있다.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정확하게 50대50으로 의석을 차지하고 있다.

헌법에 삼권분립을 기초로 한 대의민주주의를 명시하고 있으며, 마론파 기독교, 이슬람 수니파, 이슬람 시아파를 중심으로 각 종파 간의 권력 분배를 국가조직의 기본으로 하는 특색이 있다. 1989년 종파 간 맺은 협약에 따라 대통령은 기독교 마론파, 총리는 이슬람 수니파, 국회의장은 이슬람 시아파, 국방장관은 드루즈파, 군사령관은 마론파 출신 중에서 선출한다.

현재 대통령이 몇 달째 공석중이라는 말은 종파간 타협이 되는 인물을 찾지 못했다는 얘기다. 기타 정부 및 군부요직은 종파 안배를 폐지하기로 하였으나 사실상 주요 공직은 여전히 종파 안배가 이루어지고 있는 세상에 둘도 없는 특별한 나라다.

레바논의 영광과 시련

레바논은 1950년대와 60년대 주변의 아랍 국가들이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한 정변과 군사쿠데타 등으로 혼란이 반복될 때 비교적 안정적인 정치, 경제체제를 유지하여 주변 아랍국가의 자본과 고급인력을 흡수하면서 번영할 수 있었다. 특히 주변 아랍국가의 빈약한 서비스산업은 레바논의 급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요인이었다. 다른 중동 국가에 비해 정치, 종교적인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웠던 레바논은 교육, 의료, 금융, 관광과 같은 서비스산업을 통해 국제적인 교역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아랍국가 간의 전쟁으로 상황이 악화되면서 레바논의 번영도 종지부를 찍었다. 1970년 요르단 내전이 일어나자 팔레스타인 난민이 유입되어 레바논이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의 근거지가 되면서 레바논은 중동의 전화에 휩싸이게 되었다.

1975년2월,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을 지원하는 이슬람교도와 이를 대항하는 팔랑헤 민병대를 결성한 마론파 그리스도 교인들의 싸움으로 내전이 시작되었다. 1976년11월 시리아군이 국경을 넘어 이 내전에 개입하고,1982년6월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하여 내전이 국가 간 분쟁으로 양상이 확대 전개됐던 것이다.

1992년 내전은 종식되었지만 폭탄테러와 정치인 암살 등 혼란에 계속되었다. 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노력했던 수니파인 라피크 하리리 수상이 2005년 폭탄 테러로 숨지고, 2012년 수니파의 정보수장이 폭탄테러로 사망하자, 수니파는 테러사건의 배후로 시아파를 지목하여 이슬람 안의 교파 간의 싸움도 격화되었다.

그사이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와 더불어 세계 3대 미항으로 이름을 날리던 베이루트에 관광객의 발길은 뚝 끊어지고, 문화인들은 행사를 접고 경제인들은 가족을 데리고 레바논을 떠났다.

4백만 명이라는 인구 통계 숫자가 100만 명의 오차가 있는 것도 내전으로 인구 이동이 심하기 때문이다. 누구는 인구가 5백만이라고 하고 누구는 레바논 인구가 3백만이라고 한다. 떠났다가 오고, 왔다가 떠나가는 레바논의 이동인구 때문인 것이다.

마론파 기독교

기독교 마론파(Maronites)의 역사는 곧 레바논의 역사다. 마론파는 지난 1500년 간 레바논의 역사의 중앙에서 살아왔다. 그들의 과거가 레바논의 역사이고, 그들의 현주소가 레바논의 현실이다. 그리고 그들의 미래가 레바논의 미래를 예시해준다.

마론파의 기원은 5세기 경건주의 수도사 ‘성 마론(St. Maron)’을 따르는 천주교인들에 있다. 처음 마론파는 하나의 독립된 교회가 아닌 일종의 경건주의 신앙운동이었다. 그러다 451년  칼케돈 신조가 발표되어 가톨릭교회가 찬반으로 갈렸을 때 성인 마론을 존경하고 따르는 공동체 교인들은 이 칼케돈 신조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당시 레바논을 주관하고 있는 시리아의 천주교 다수파는 이 칼케돈 신조를 반대했다. 자연히 마론을 따르는 교인들은 탄압을 받게 되고, 결국 레바논 산지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고, 거기서 은둔적인 수도생활을 중심한 신앙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들은 레바논 산맥에 형성된 깊은 계곡에 수도원을 짓고 산동네 부락을 형성하여 살았다.

이러한 특성과 지리적인 고립성으로 인해 이슬람 세력이 시리아를 정복한 6세기 이후 마론파의 존재는 오랫동안 잊혀졌다. 그러다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 서유럽 군대가 레바논을 통과할 때 마론파 사람들이 십자군을 환영하고 나옴으로써 그 존재가 기독교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때부터 마론파는 서유럽 기독교 세계와 관계를 맺으면서 교세가 안정되고 마론파 교인들의 코뮤니티도 확장되어 갔다.

마론파, 칼케돈 신조 반대

오토만 제국에게서 자치권을 얻은 마론파 기독교들은 1943년 독립 당시 레바논을 거주지로 하여 다수파를 형성했다. 레바논에서 시아 및 수니 등 이슬람 세력은 소수였고 정치, 경제, 사회의 주류는 마론파 기독교가 차지하고 있었다.

이 균형을 깨트린 것이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이다. 1982년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해서 시작된 전쟁이지만 사실상 이스라엘과 시리아의 전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계 민병대인 팔랑헤당이 이스라엘군과 협력해 대학살을 자행했다. 남자들은 모두 대피한 뒤인 팔레스타인 난민촌에 팔랑헤 무장병력 150여 명이 침입해서 출입을 완전히 봉쇄하고 3일 동안에 걸쳐서 마을 전체를 학살했다.

이때 희생자는 대부분 부녀자와 어린아이들이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군은 조명탄을 쏴주면서 이 학살을 부추겼다. 이 사건이 드러나면서 전 세계적으로 비난이 쏟아지고, 이로 인해서 당시 전쟁 책임자인 이스라엘 국방장관 아리엘 샤론이 퇴임한다. 빈 라덴이 이 학살을  보고 격분해서 9․11 테러를 기획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기독교계 팔랑헤당, 팔레스타인 대학살 자행

기독교 민병대는 대부분 마론파 사람들로 세계적인 비난을 자초하게 되었고 스스로 입지를 어렵게 했다. 게다가 이슬람 인구는 늘어나는 반면 마론파의 인구는 줄어들어 마론파의 영향력은 예전과 같지 않다.

마론파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일원으로 인정되며, 스스로 교황의 수위권에 따르고 있고 교리적으로도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리를 따른다. 그러나 교황이 마론파 주교를 직접 선임하는 것이 아니라 주교들이 자체적으로 마론파의 총대주교를 선출하면 교황청이 이를 추인하는 형식을 취한다.

마론파의 저력이 저절로 서방세계의 도움을 받아서 생긴 것은 아니다. 1500년 간 역경의 역사를 견디어온 조상들의 정성과 헌신의 결과다.

베이루트=황엽주 본지 중동지역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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