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문제, 고대신사문화에 답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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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수 교수가 일본의 신도문화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올해가 한·일 수교 50주년, 광복 70주년이지만 한·일 간의 갈등은 여전하다. 당대 최고의 수학자 김용운 선생은 이 갈등의 원인을 663년 백제·왜 연합군이 신라·당 연합군과 맞붙은 백강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시작됐다고 했다. 고 법정 스님도 신라에 패한 백제유민이 일본으로 대거 이주하면서 한·일 간의 갈등이 시작됐다고 했다. 두 나라는 갈등의 골도 깊지만 같은 점도 많다. 중원대학교 김철수(56) 교수는 한반도에서 시작된 제천의식이 일본 신도문화에 끼친 영향과 흔적을 찾는 연구를 해오고 있다. 김 교수를 통해 한·일 간의 종교문화를 알아본다.<편집자 주>  

- 일본 신도에 대해 연구하게 된 동기는

1994년 일제 강점기 서울 남산에 세워졌던 조선신궁의 역할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됐다. 일제가 실시한 한민족 ‘황민화’ 정책 가운데 1925년 남산에 세워졌던 조선신궁이 그 정점에 위치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조선신궁을 연구하면서 일본의 신궁, 신사에 대한 이해를 하게 됐고 일본의 신도문화를 이해해야 조선신궁 설립 의도도 충분히 밝혀지리라 생각했다.

일본은 조선신궁을 세워 일본의 시조신 아마테라스 오미가미(天照大神)를 진좌(鎭座)하고 단군성조를 아마테라스 밑에 합사하여 민족의 뿌리를 아예 제거하려 했다. 한편으로는 일본의 신궁, 신사가 역사적으로 본다면 한민족의 고대 종교문화와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 신도의 정의는

일본의 역사 기록에 보면 용명천황(用明·31대 585-587) 때 “불법을 믿고 신도를 공경하였다”라 하여 신도에 대한 용어가 나타난다고 한다. 그러나 신도는 한마디로 ‘신의 길’ 곧 고대 한민족이 지녔던 신교(神敎)였다. 그것이 일본 열도로 건너가 신도(神道)라는 명칭을 갖게 된 것이다. 일본의 신도에서는 소위 ‘팔백만신’을 말한다. ‘팔백만신’에서 알 수 있듯, 일본에 신은 무수히 많다. 소위 사방팔방이 신으로 꽉 차 있고 사람들은 신과 함께 살아간다.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보라. 부뚜막신, 부패신 등 없는 신이 없다. ‘가미(神)’라는 명칭이 붙은 것이 다수라는 뜻이다. 가장 많은 것이 천체, 산, 들, 강, 바다, 바람, 비 등 지수풍토 등을 비롯하여 새, 짐승, 벌레, 수목, 풀, 금속, 돌 등 자연현상이나 자연물에 붙여진 신의 명칭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할 것은 놀랍게도 일본 역사의 정점에도 ‘삼신’이 보인다는 점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일본서기와 고사기의 ‘신대기’(神代記)에 보이는 ‘조화삼신’(造化三神)이 그것이다. 세 신은 아메노미나카누시노가미(天御中主尊)와 다카노무스비노가미(高皇産靈尊) 그리고 칸무스비노가미(神皇産靈尊)를 말한다. 여기서 고황산령신과 산신(産神=무스비 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 신도와 일본불교와의 관계는

6세기 중반 흠명천황(欽明·29대 539-571) 때에 야마토 왜에는 기존 문화를 뒤흔드는 혁명적 문화 전환이 일어났다. 기존의 ‘신도’ 중심의 문화에서 ‘불교’ 중심의 문화로 자리바꿈한 사건이다. 물론 이 혁명은 도래인들의 영향력 아래서 일어났다. 백제 계통의 새로운 불교문화가 신라왕자 천일창이 퍼뜨린 신도문화를 밀어낸 것이다. 문화 전쟁은 민달천황과 용명천황(用明·31대 585-587) 때에 결말이 났다. 용명은 흠명의 네 번째 아들이다. 그는 “불법을 믿고 신도를 공경하였다.” 그리고 불교에 귀의하려 했다. 이는 우리 역사에서 법흥왕 때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문화로 전환된 상황으로도 잘 알 수 있다.

- 일본 신사의 원형은

일본에서 신사를 뜻하는 사(社)는 야시로(ヤシロ)라고 한다. 그 어원은 ‘야(ヤ)=屋’+‘시로(シロ)=영역’이며, 신의 자리를 세우기 위해 설치된 특별한 장소다. 곧 야시로는 ‘신의 땅(神地)’이라는 의미로 성소다. 그러나 이러한 야시로가 반드시 상설의 신의 궁,신전,사전(社殿)을 의미했던 것은 아니었다.

일본에서는 신사를 모리(モリ)라고도 했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노래집인 만엽집에서는 杜, 森, 社, 神社를 모두 ‘모리’(森)라 읽었다. 신사를 모리(森 또는 社) 곧 ‘숲’으로 본 것이다. 이는 고대 일본인에게 숲 곧 삼림이란 신들의 영이 깃든 신성한 영역으로 사람이 함부로 들어가서는 안 되는 곳이라고 생각했음을 뜻한다. 신사마다 신성한 지역으로 만들어진 산(숲)이 있었고, 이를 신체산(神體山)이라 했다. 신사에 신은 상주하지 않았고 때가 되면, 특히 마쓰리(축제) 행사를 할 때면 신은 하늘에서 이 신체산을 통해 내려오게 된다. 이때 사람들은 임시 신전(神社)을 꾸며 신을 받들었던 것이다.

지난해 미국 LA에서 개최된 한사상대회에서 일본 신도문화를 설명하고 있는 김철수 교수
- 신사와 마쓰리의 관계는

마쓰리는 신을 맞이하는 의례다. 곧 신을 맞고(迎神), 사(社) 곧 야시로에 모셔 제례를 행한 뒤 다시 보내드린다(送神). 여기서 사는 나중에 ‘신사神社’가 됐다. 마쓰리에서는 이곳이 곧 제례를 행하는 ‘제장(祭場)’이었다. 신의 제장인 야시로는 본래 신좌(神座)가 있는 산이었다. 제장의 본 모습은 숲(森) 곧 ‘두(杜)’(もり·모리)였다. 단순히 자연의 삼림이 아니라 신의 정원이었으며 제장이었던 것이다. 그 제장에 선 건물이 지금은 ‘신사’라 불리워진 것이다.  

신은 자신의 정원인 모리(杜)에 강림한다. 구체적으로 그곳에 있는 바위나 나무에 내려온다. 본래 마쓰리는 이러한 신이 내린 곳을 찾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예를 들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신은 낙뢰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기 때문에 낙뢰의 흔적을 찾게 된다. 낙뢰에 의해 깨진 흔적이나 불에 그슬린 나무 등이 그것이다. 나중에는 화살을 날려 화살에 맞은 나무를 찾아 신목으로 정하기도 했다.

신의 자리가 정해지면 시메나와(注連縄·일종의 금줄)로 그 주변을 둘러싼다. 신정(神庭)의 경계를 표시하고 결계하는 것이다. 때문에 신좌(神座)는 항상 고정된 것이 아니다. 최초의 마쓰리는 그 신좌 앞에서 행해지게 된다. 그곳이 제 1의 제장이고 최초의 야시로(社)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건축물이 아닌 신정(神庭)=제장(祭場)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마쓰리의 장소는 매회 바뀌는 것이다.

이처럼 신은 사(社)에 항상 있는 것이 아니라 마쓰리의 경우에만 강림한다. 또 신은 곧바로 신사가 있는 곳으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별도의 장소로 강림하는 것이다. 이것이 일본 신사에서 행해지는 마쓰리의 기본구조이자 원형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편의상 사람들은 보다 준비된 마쓰리를 생각하게 됐다. 그래서 마쓰리를 위한 건물을 만들었다. 점차 인간의 욕망을 위해 훌륭한 제장을 원하게 됐고, 이를 위한 건축물인 신사가 등장한 것이다.

- 신사에 있는 고대 한국의 흔적이 있다면

고사기를 보면, 대년신(大年神)의 계보에 가라카미(韓神), 소호리(曾富理)신, 시라히(白日)신 등이 나온다. 이러한 신들도 도래신인 것은 명백하다. 가라카미는 그 명칭으로 보았을 때도 한국, 결국 고대 조선의 신이다. 그런데 일본 왕실에서는 지금도 가라카미를 모시고 있다. 연희식(延喜式)(927)은 궁내성 좌신(坐神) 삼좌(三坐)로서 한신사(韓神社) 2좌, 원신사(園神社) 1좌를 들고, 사시제상(四時祭上)에 봄 2월, 겨울 11월 축(丑) 날에 제사한다고 적혀 있다. 양사(兩社)는 함께 하타(秦)씨가 제사하던 신이었지만, 헤이안경(지금의 교토시)이 조영된 후 그 땅을 지키는 신이 돼 궁내성에서 제사하는 신이 됐다. 일본 왕실의 궁중에서 불려지는 가구라(神樂)에는, ‘한신’의 노래가 있다. 그 노래는 “미시마 무명 어깨에 걸치고”로 시작하면서 ‘한신’을 부른다. 노래에 있는 “韓招ぎ”는 문자 그대로 “한신을 모셔오자”라는 뜻이다.

일본 신사의 입구를 보면, 어느 곳이나 토리이(鳥居)나 고마이누(狛犬)가 세워져 있다. 이것도 기층에 한반도 도래의 신앙, 민속이 농후하다는 증거다. 토리이는 말 그대로 새가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새는 땅과 인간과 하늘을 연결하는 신조다. 우리가 살던 마을 입구에 새가 앉아 있는 솟대를 생각하면 토리이가 한민족과 무관하지 않음을 알게 된다. 고마(狛)는 고려의 일본식 한자음이다. 여기서 고려는 고구려를 뜻하고 이누는 개다.

- 서구학자들이 이세신궁(伊勢神宮)과 이즈모대사(出雲大社)를 극찬했다는데

일본 신도문화의 산실이자, 일본 정신사의 양대 메카, 이세신궁과 이즈모 대사. 이세신궁은 일본 왕실의 조상신인 아마테라스 오미가미(天照大神)를 모신 신사며 일본 정부의 개각 때면 정부 관료들이 참배하는 곳이다. 이즈모대사 역시 이세신궁과 더불어 일본 고대사를 대표하는 신사로, 일제 강점기에는 식민사관 중 하나인 일선동조론과 관련된 스사노오 신의 아들 오쿠니누시 노가미(大國主神)를 제사하는 신사다. 일본의 이러한 양대 신사가 모두 고대 한민족과 연결된 신사다.

이세신궁은 처음에 한민족과 관련된 신을 모셨으나, 일본의 소위 ‘만세일계’ 왕실과 일본 고대국가 성립 과정에서 일본 왕실의 최고신 아마테라스 오미가미(天照大神)로 왜곡돼 버린 곳으로 1967년 가을, 부인과 함께 이세신궁을 방문한 토인비는 이곳이 ‘모든 종교가 통합돼 있는 세계에서 가장 성스러운 곳’이라 극찬했다. 이처럼 외국인들이 극찬한 두 신사, 고래로부터 일본인의 정신적 구심점이 된 신궁·신사를 중심으로 한 신도가 바로 동북아 제천문화의 변형인 것이다.

김철수 교수는 경북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일본 교토 불교대학에서 일본과 한국의 근·현대 종교문화를 연구했다. 연구를 진행하면서 일본의 고대 신화와 일본 민족의 중심 종교인 신도에서 신교(神敎)의 흔적을 찾았고 이들의 뿌리가 한민족에 있음을 알고 일본 열도에 남아 있는 신교와 고대 한민족의 흔적들을 찾아보기 위해 큐슈 지역이나 오사카·나라 지역 그리고 이즈모 지역을 돌아보면서 역사 찾기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현재는 중원대학교 종교문화콘텐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21세기 종교사회학’, ‘일본 고대사와 한민족’, ‘일본의 고신도와 한민족’, ‘일본의 고대문화와 한민족’ 등이 있으며 ‘말법사상과 삼계교의 사회활동성’, ‘일본 신종교의 생명주의적 세계관’ 등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다.

정영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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